Page 92 - 우리는 민원담당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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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는 잿빛 논이 그대로 보인다. ‘이거 재배 안한 거 아냐?’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미끄러질까 둑을 따라 발톱 걸음으로 논
끝까지 가봤다. 역시나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다. ‘희한하네.
눈으론 경계가 없는 한 논인데 왜 여기만 이렇지? 밭으로 쓰려고
남겨 두셨나?’ 바로 신청인에게 전화를 했으나, 신호음만 뚜~
계속해서 울릴 뿐 통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왔다. 점검 일정이 그리 녹록치 않아 현장에서 일이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개운치가 않다. 이후로도 여러
번 전화했으나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는다. 모르는 번호라서 받지
않을 수도 있어 나중에 직접 방문하기로 하고 일단 다른 농지들을
계속 점검했다.
그렇게 논이모작 현장 조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 간신히 신청
농민과 연결이 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반가워
탄성이 먼저 난다. 그동안 병원에 계셔 전화를 못 받으신 거였다.
“어르신, 논에 이모작으로 사료 심는다고 신청한 농지 있잖아요,
근데 끝에는 왜 안 심으셨어요?” “뭐여, 안 심은 곳 없는 디, 다
심었어! 정확히 본 겨?” 확신에 확신을 더한 답변이다. 몇 번을
설명 드려도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신다.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란 생각에 내일 만날 시간을 약속하고 현장에서 직접 뵙기로
하였다.
다음 날, 해당 농지에 도착하기 5분 전에 전화를 드리니 벌써
논에 와 계신다고 하신다. 아마도 어르신은 이게 뭔 일인가 걱정에
밤새 뒤척이셨을 것이다.
82•2020년 농관원 민원 수기 모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