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우리는 민원담당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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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를 심었다.’는 말씀만 되풀이하다가 나중엔 예초기를 메고,
그 논으로 가서 키가 껑충한 잡초를 베셨단다. 주임님도 장화를
신고 따라 논에 들어갔단다.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찬히
봤지만, 미나리의 존재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농가도
마찬가지였단다.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단다.
결국 함께 논둑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주임님이 미재배 사실에
대해 확인 서명을 요청하자 농가는 한참을 눈만 끔벅거리며 가타
부타 말을 하지 않으셨단다. 그러다 할 수 없다는 듯 태블릿에
저장한 사진에 ‘미나리 없음’이라 쓰고 그 옆에 서명하셨고, 조사
표에도 자필로 특이사항란에 ‘미재배’, 서명란에 이름을 적으셨다고
했다. 다른 날보다 두 배는 더 힘들었단다.
그렇게 잘 끝난 줄 알았는데, 문제는 뒤에 일어났다. 한 해
업무를 마감하던 12월 중순쯤 그분이 본원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자신은 분명 미나리를 심었으나 일기불순으로 생육이 불량한 건데,
농관원의 불성실한 업무처리로 지원금을 못 받게 됐다. 거기다가
직원들이 농업인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내용을 전해들은 나는
뭔가 오해를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분을 만나러 갔다.
나는 그분과 그 논둑에 섰다. 겨울이라서 우거진 잡풀도 사라진
상태였다. 첫 번째, 두 번째 농지에서는 미나리 재배 흔적을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농지에서 미나리가 말라
죽은 흔적 일부를 발견했다. 해당 농지에 벼를 재배한 사실이 없고,
일기가 불순하여 미나리 작황이 안 좋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제야 그분은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후 마지막 농지에
64•2020년 농관원 민원 수기 모음집